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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양봉자 : 성우제(캐나다)
이민문학
등록일 2020-06-19 15:35:00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쪽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프린트하기


그녀는 지하철 좌석에 앉아 아무런 말도 없이 줄곧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단정하게 뒤로 쓸어 묶은 머리. 검은 색 머리카락 사이로 은빛이 소복소복 빛나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흘끗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단정해 보였다.

 

 

그녀는 다운타운에서 노스욕으로 올라가는 지하철 안에서 1시간 가까이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곁눈질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표정에서는 삼엄함마저 감돌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미시타 권, 남자들은 자기 마누라가 잠자리를 마다 하믄 자존심이 정말로 그렇게 상하는가? 왜 그럴까, 잉??함께 일하는 샌드위치숍에서 김 언니로 통하는 그녀는 생김새와 말투가 이렇게 딴판이었다.

 

 

조용한 표정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돌았다. 그러나 입만 열면 저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심한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구수하다기보다는 김 언니의 단아한 이미지를 싹 바꾸는 촌티가 폴폴 나는 사투리였다.

 

 

?미시타?가 아니라 ?미스터?라고 미스터 권이 여러 차례 말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려?? 했다가도 돌아서면 바로 ?미시타?였다.

 

 

?왜요?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미시타 권이 기냥 편해서 옛날 생각이 난 김에 한번 물어본 겨.??글쎄요……?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김 언니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고 김 언니의 나이가 아무리 쉰을 넘겼다고 해도 부부간 잠자리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아무래도 쑥스러웠다.

 

 

미스터 권과 김 언니는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는 빅월드라는 이름의 샌드위치숍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였다. 그 가게는 캐나다 최대 도시의 최대 방송사인 CTV 건물 지하에 자리잡고 있어서 손님도 많고,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김 언니와 미스터 권은 ?우리 한번 진하게 뭉쳐보자?며 여주인 니키가 소집한 회식 자리에 가는 길이었다.

 

 

니키의 본명은 김순영. 캐나다 땅인 만큼 서로가 편하게 영어 이름을 하나씩 쓰고 있었으나 김 언니는 그냥 김 언니로, 제임스도 미스터 권이라 불렸다.

 

 

?김 언니, 미스터 권, 여기야 여기.?

 

 

두 사람이 한식 전문점인 다정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쪽 구석에서 니키가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평소 큰 소리로 손님을 맞는 샌드위치숍의 베테랑 주인답게 니키의 목소리는 언제나 크고 카랑카랑했다.

 

 

니키와 캐서린은 족발과 두부김치를 안주로 시켜놓고 벌써 소주를 두 병째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언니, 하도 안오길래 우리가 먼저 시작했어. 빨리 앉아. 아줌마 여기 두 사람 더 왔어.? 니키는 바깥에서 모이는 자리에서도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 큰 목소리는 술기운 때문인지 그날따라 더 크게 들렸다.

 

 

?맥주로 하지 왜 또 소주로 시작냐? 또 취해서 울라꼬? 벌써 2병이나 마셨냐??김 언니는 자리를 잡으며 혀를 찼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다는 말투였다.

 

 

거의 석 달마다 한번씩 열리는 이 회식 자리에서 니키의 남편 피터는 언제나 왕따를 당했다. 언젠가 열린 회식 자리에서 사장인 그가 사고를 친 다음부터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때 말이지, 백인 여자를 하나 꼬셨는데 말이지?? 하면서 시작한 피터의 과거 무용담이 본론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니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 피터 앞에서는 빅월드 사람들 모두가 ?회식?뿐 아니라 ?회?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피터가 참석하면 단합 대회가 아니라 분열 대회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운타운에서 1시간 가까이 벗어나 노스욕에서 모임을 갖는 것도 혹시 피터의 눈에 띌까 봐 겁이 나서였다.

 

 

?아이고, 내가 그 인간 때문에 가슴속에 쌓인 게 얼만데? 쌓인 거 백분의 일이라도 풀라면 싱거운 맥주로는 안되지, 고럼, 안되고 말고.?니키의 남편 피터는 겉으로는 환한 웃음을 지닌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기 이득을 챙기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인사였다.

 

 

?아이구, 귀신들은 다 죽었나, 어째 저런 화상을 아직도 안 잡아가? 요즘 귀신들은 직무유기가 너무 심한 거 같어.? 니키의 푸념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 저 푸념은 때로 악다구니로 돌변하기도 했다.

 

 

미스터 권은 빅월드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니키의 남편이 종업원들로부터 사장님이 아니라 아저씨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누라 등쳐먹는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 아저씨는 아주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니키, 이제 고마 해라. 너만 그런 게 아니잖아??

 

 

캐서린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은 소주 2병의 안주거리로 남편들을 엄청나게 씹어댄 게 틀림없었다. 마흔살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늘 친한 친구처럼 지냈다.

 

 

?야, 캐서린. 우리 김 언니 대단하지 않냐? 너 솔직히 말해. 부럽지, 부럽지, 언니가 부럽지???그래, 부러워 죽겠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언니, 미스터 권 벌주 세 잔 알지? 한 큐에 탁 털어 넣는 거야, 알았어?? 말투로 보아 캐서린도 어지간히 취한 듯했다. 평소에는 미스터 권에게 농담으로도 반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언니가 진짜 부러워, 부러워 죽겠다니깐……? 시간이 지날수록 니키의 목소리는 커졌다. 게다가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했다.

 

 

?언니가 진짜로 부러워, 부러워……?

 

 

 

 

 

니키는 캐나다를 언제나 ?개나다?라고 불렀다.

 

 

?아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꼬요? 이거 왜 이래요? 나한테는 욕밖에 안나오는 개나다라구요, 개나다.? 니키는 한국 사람들끼리 반드시 하게 마련인 이민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언제나 이렇게 답했다며 피식 웃었다.

 

 

?18년.?

 

 

이곳에 온 다음 해부터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18년 빼기 17년, 18년 빼기 16년, 이렇게 말이쥬. 근데 그렇게 빼다 보니 인제 진짜 18년이 돼버렸네유.?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니키는 부모와 함께 서울에 온 캐나다 교포 청년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좀체 보기 드문 스타일이었다.

 

 

새하얀 얼굴에 화사한 웃음, 그리고 풀풀 풍겨나는 비누냄새 앞에서 김순영은 눈이 부셨다고 했다. 만난 지 한 달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캐나다로 결혼해 간다고 김순영의 친구들은,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사인을 해달라고 쫓아다녔다. 구름을 밟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신랑을 따라 토론토에 오자마자 구름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공포로 돌변했다. 시부모는 새 며느리의 여권부터 빼앗아 숨겼다.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때 약물 중독자였고 생활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새 신랑의 정체는 순진한 김순영의 눈에도 금세 드러났다.

 

 

갓난아기를 들쳐업고 식당 종업원이며 관광 가이드까지 하면서 니키가 억척을 떤 덕에 그 집안은 종업원을 셋씩이나 둔 번듯한 샌드위치숍을 일굴 수 있었다.

 

 

?새벽에 나가 일하고 오후에 들어와 잠깐 눈 붙이고 밤에 나가 또 일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두 탕도 뛰었구만유.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짜리 장편소설이유. 남편이라는 저 화상은 내가 파김치가 되어 쓰러져 자는데 밤마다 괴롭히고, 돈 벌어다 주면 침 발라가며 세기만 했시유. 한마디로 끔찍했쥬.? 니키의 이야기가 몇 권짜리 장편이라면 자기 이야기는 최소한 한 권은 될 것이라고 캐서린은 늘 주장했다.

 

 

미스터 권은 캐서린을 통해 소포 결혼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 교포 청년이 한국에 나가 신부감을 구해 오는 것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신부를 소포로 싸서 보낸다는 의미일 테지만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미스터 권은 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캐서린은 자기 스스로 소포 결혼을 했다고 여겼다. 그녀는 남편이 캐나다의 청년 실업가라고 해서 그냥 따라왔는데, 와서 보니 남편이 진짜 캐네이디언이었노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언니, 진짜 캐나다 사람이 어떤 건지 알아?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거야. 저축이란 걸 몰라. 저 인간과 1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도 원룸 아파트에 세 들어 살잖아. 그래서 내가 생각을 바꿨지. 어차피 캐나다 사니까 나도 캐나다 사람되자고……?주량이 소주 한 잔밖에 안 된다는 김 언니는 그 한 잔이 들어가자마자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내뿜었다.

 

 

?야이, 이 년들아. 네들이 소설이면 나는 드라마다, 드라마. 그것도 대하 드라마다, 대하 드라마.?김 언니의 진짜 이름은 양봉자라고 했다. 캐나다에 이민을 오면서 남편 성을 따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김봉자가 되었다.

 

 

?언니, 봉자가 뭐야, 봉자가. 오드리 같은 이름 하나 지어. 오드리, 근사하잖아.?니키가 영어 이름을 하나 지으라고 해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어? 하며 끝내 못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봉자 언니라고 부르면 몸서리를 쳤다. 촌스러워서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착을 본 것이 김 언니였다. 니키와 캐서린은 물론 니키의 남편까지 김 언니, 김 언니 하는 바람에 미스터 권도 얼떨결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 년들아, 니들 내 앞에서는 까불지들 말어. 니들 서방하고 몇 년이나 살았냐? 나는 30년 동안 살을 대고 살았다, 이 년들아. 웃기지들 말어.? 김 언니는 소주 한 잔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도 빠른 니키의 순발력은 술자리에서 더욱 빛났다.

 

 

?아이고, 언니는 그 서방하고 30년이 아니라 300년을 살았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겠네, 뭐. 늘그막에 새 남자 만나 연애하지, 함께 살지, 이게 어디 아무한테나 오는 복인 줄 아슈? 어디 그뿐이야? 그 백인 영감님이 언니한테 그렇게 끔찍하대며? 환갑 바라보는 늙은 나무에 무슨 싹이 새로 난대, 그래? 아이고, 제대 말년에 복터졌네, 복터졌어. 이러니 부럽지, 안부러워??니키의 이같은 긴 푸념을 김 언니는 은근히 즐겼다. ?그건 그려? ?맞어, 니 말이? 하며 때로는 추임새까지 넣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니키가 비록 김 언니를 고용한 식당 주인이라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고용자-피고용자를 뛰어넘는 각별한 것이었다.

 

 

니키가 아기를 들쳐업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을 할 때 처음 만난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두 사람은 친자매나 다름없이 살아왔다. 둘은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언니 없이는 겁이 나서 일을 못하겠다며 자기가 인수한 샌드위치숍의 종업원으로 와달라고 니키가 부탁했을 때도 김 언니는 두 말 않고 달려왔다.

 

 

니키를 동생처럼 여겨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남편으로 인해 생긴 니키의 포한이 다름 아닌 자기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니키가 ?언니, 나 저 인간하고 진짜로 못살겠어. 어디로 도망가면 안될까??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을 때마다 니키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니키의 남편에게 살의까지 느꼈던 김 언니였다. 못된 남편에 대한 김 언니의 증오는 그만큼 크고 깊었다.

 

 

그런 김 언니는 지금의 그녀가 진짜 양봉자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남편을 버리고 털북숭이 백인 남자와 딴살림을 차린 사람이 얌전한 양봉자라고? 저 대담한 결단에 김 언니 스스로가 놀라던 터였다.

 

 

스티브와의 사랑은 전광석화 같았다. 만난 지 3개월만에 살림을 차렸으니, 김 언니 자신조차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캐나다에 온 지 10년이 넘었건만 영어라고는 한 두 마디밖에 하지 못하는 김 언니가, 한국말이라고는 한 두 마디도 못하는 60대 백인 남자와 눈으로 연애하고 살림까지 차렸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김 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인연으로 돌렸다.

 

 

 

 

 

점심시간만 되면 니키네 샌드위치숍 빅월드는 불난 호떡집이나 진배없었다. 언제나 바쁜 방송국 직원들은 오전 11시만 지나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니키와 김 언니, 캐서린은 주문대에 서서 ?넥스트? ?넥스트? 하며 다음 손님을 입이 아프도록 불렀다. 3시간 가까이 300명 이상 몰려드는 손님을 맞으려면 귀도 밝고 손도 빠르고, 무엇보다 동작이 빨라야 했다.

 

 

미스터 권 또한 주방과 주문대 사이를 뛰어다니며 프렌치 프라이를 튀기고, 하루 네 가지 종류의 수프를 퍼 나르고, 냉장고에 들어가 야채 따위를 꺼내 썰어오고, 정신 없이 설거지를 했다. 점심시간 빅월드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다름 아닌 전쟁터였다.

 

 

그 전쟁 중에도 니키의 남편 피터는 특유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땡큐, 해브 어 나이스 데이?를 기계처럼 달달 외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등은 땀으로 범벅이 되건 말건, 하얀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피터의 멀건 얼굴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예쁜 여자 손님에게는 1~2달러씩 음식값을 깎아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니키는 ?아이구, 저 화상, 저 화상? 하면서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9월초 어느 날인가부터 김 언니 눈에 한 중늙은이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1미터65센티는 될까? 백인답지 않은 작달막한 키에 배와 엉덩이가 앞뒤로 툭 튀어나온 손님은 줄을 섰다가도 김 언니에게 주문하지 못하면 뒷사람에게 자꾸 양보를 했다.

 

 

니키와 캐서린이 ?캔 아이 핼프 유??라고 소리를 질러도 못들은 척했다. 그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뒤로 돌아서서 ?고우 어헤드(먼저 가세요)?라고만 짤막하게 말했다.

 

 

그런 그가 김 언니 앞에만 서면 김 언니가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튜나 샐러드? 하고 득달같이 주문을 하곤 했다.

 

 

빅월드에서 만드는 샌드위치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손맛을 많이 타는 튜나-애그-치킨 샐러드 샌드위치 세 종류였다. 베이컨, 양상추, 토마토를 넣어주는 BLT와 두들겨 편 쇠고기를 계란을 푼 우유에 적신 다음 빵가루에 묻혀 튀긴 일명 ?스네이서?, 햄-터키브레스트-로스트비프를 넣어주는 샌드위치 등 그 종류가 스무 가지에 이르렀지만 튜나-애그-치킨 샐러드 샌드위치가 매상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스티브가 늘 주문해 먹는 튜나 샐러드는 김 언니의 전문 분야였다. 튜나 샐러드는 조금만 실수를 해도 비린내가 나서 맛을 버리지만 솜씨 좋은 이가 만들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김 언니는 ?나는 된장국보다 튜나 샐러드를 더 잘 만들 자신이 있다?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포 히어(여기서 먹을래), 투 고우(가져갈래)??

 

 

김 언니가 물으면 스티브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포 히어.?

 

 

그리고는 바로 앞 탁자에 앉아 샌드위치와 수프뿐 아니라 커피까지 주문해서 1시간도 넘게 느긋하게 먹고 마셨다.

 

 

언제부터인가 샌드위치를 싸는 김 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빵 가운데 넣는 튜나가 옆으로 터져 나오도록 꾹꾹 눌러 담아주는가 하면, 함께 넣는 상추도 두어 장 더 넣어주고 토마토도 듬뿍 얹어주었다.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은 눈길을 교환하기 시작한 것은 샌드위치를 전해주던 김 언니의 손길이 스티브의 손과 우연히 닿았을 때부터였다. 통하지 않는 말보다 손을 통한 우연한 접촉이 두 사람을 순식간에 포박할 줄은 당사자들도 몰랐다.

 

 

?샌드위치를 싸주면서 어쩌다 손이 삭 하고 닿았는데 가슴이 콩닥콩닥 하더라구. 저 백인 아저씨도 얼굴이 빨개지더만. 그 모습을 보니 내 맘이 또 월매나 떨리던지…… 남자 앞에서 그렇게 떨기는 첫날밤 신랑이 옷고름 풀 때 이후 처음이여. 그 담부터는 저 아저씨가 뻔뻔스럽게도 손을 턱턱 잡더라고. 나는 떨면서도 빼지 않았지. 저 사람도 떠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더라고.?두 사람의 사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스티브는 CTV의 앵커 출신인 부인과 이혼하고 3년째 홀아비로 살던 터였다. CTV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10시 뉴스>의 담당 PD였던 스티브는 주말만 되면 화려한 파티에 끌려가듯 참석해야 했다. 역시 화려한 미모의 부인이 파티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모든 것이 갑자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부인과 사는 것도 답답했다. 아내가 딱히 싫어서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두 사람의 성향은 확연하게 갈라졌다.

 

 

지난 30년 동안 사람 사는 이야기, 곧 뉴스에 시달려온 스티브는 나이를 먹을수록 고즈넉한 시간을 원했지만, 평생 스타 대접을 받아온 아내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으면 마치 삶의 의미라도 잃어버리는 것인 양 파티와 같은 시끄러운 세계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스티브는 집에서 몸만 빠져나왔다. 아내에게 집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다 넘긴 터여서 그냥 홀가분했다. 따로 사는 자식들도 부모의 이혼에 개의치 않았다.

 

 

스티브는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사는 것이 더 없이 좋고 행복했다.

 

 

그런 그의 눈에 방송국 건물 지하 샌드위치숍의 한 여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달걀형 얼굴에 실눈을 한 잔잔한 표정의 동양 여인. 화려한 아내와는 그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웃어도 입을 벌리지 않고,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 어느 새부터인가 먼발치에서 그냥 그녀를 쳐다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그리하여 스티브는 하루 두 끼를 빅월드에서 해결했다. 아침은 모닝스페셜 메뉴로 때우고 점심 때는 언제나 튜나 샐러드 콤보를 먹었다.

 

 

 

 

 

미스터 권이 김 언니를 처음 대면한 것은 큰 회오리가 샌드위치숍을 휩쓸고 간 지 두어 달쯤 지난 후였다. 출근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 한 50대 중년 부인이 주방에서 샐러드를 만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김 언니야. 다시 일하기로 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눈칫밥만 30년 이상 먹었다고 자처하는 니키는 미스터 권을 보자마자 손가락을 입에 대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니키의 설명에 따르면 빅월드에 회오리는 이렇게 발생했다.

 

 

2개월 전 어느 날 샌드위치숍에 한 한국 남자가 불쑥 찾아왔다. 점심 시간이 막 끝난 오후 2시께였다. 그는 대뜸 욕부터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년 지금 어디 있어? 이리 안나와? 백인 놈하고 바람나니까 그리 좋더나? 오늘 아주 끝장을 내자, 끝장을…… 나도 니한테 당한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이다, 이기야. 빨리 안나올래? 내가 들어가서 꼭 끌고 나와야 쓰겄나??주방에서 늦은 점심을 먹다가 바깥을 살짝 내다본 김 언니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니키야, 니키야, 나 죽는다, 나 죽어. 나 쫌 살려주라. 워쩌면 좋냐, 워쩌면 좋냐??갑자기 온몸이 굳은 듯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김 언니를 니키는 뒷문으로 급히 빼돌렸다. 일하는 사람들만 출입하는 문이었다.

 

 

니키는 김 언니의 남편에게 다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우리 가게를 다 찾아오시고? 그런데 어쩐대요? 김 언니는 조금 전에 일 끝내고 나갔는데……? 거짓말을 하면서도 니키는 남편 피터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앞뒤 분간 못하는 피터가 김 언니 남편을 만났더라면 생뚱맞게 나섰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김 언니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금방 어디로 가셨대? 요즘 백인 영감하고 잘 다니시던데, 그 영감이 불러 나가셨나?? 그것은 남의 속 뒤집기와 더불어 피터의 주특기였다.

 

 

김 언니는 건물을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니 남편에게 죽도록 시달릴 게 뻔했다.

 

 

남편은 이민을 온 후 손은 대지 않았다. 신고만 하면 경찰이 쏜살같이 달려와 폭력 남편을 연행해 간다는 사실을 남편은 김 언니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은 매질 대신 아내를 들들 볶았다. 특히 다 큰 자식들 앞에서 ?이 년, 저 년? 하는 욕지거리를 들을 때는 터져 나오는 굴욕감을 있는 힘을 다해 삼켜야 했다. 맞붙어 싸우면 집안이 풍비박산날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두 아들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이 김 언니를 더 아프게 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김 언니가 터벅터벅 걸어간 곳은 바로 자기가 일하는 건물 입구였다. 정문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티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바로 스티브와 살림을 합쳤다.

 

 

김 언니의 눈물을 본 스티브는 두 말 없이 김 언니를 받아주었다. 하기야 영어라고는 두어 마디밖에 못하는 김 언니가 상황을 설명할래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빅월드를 찾아와 마누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던 김 언니의 남편은 보름이 지나자 발길을 끊었다. 바람난 아내에 대해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오쟁이 진 남편이라고 남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토론토 한인 사회에서 보름 정도면 소문이 퍼져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터였다.

 

 

어느 날 20대 초반의 두 청년이 니키네 가게에 찾아왔다. 김 언니의 두 아들이었다. 그들은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다.

 

 

김 언니는 아들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었다. 큰 아들은 대학 졸업 후 건축가가 되었고 둘째는 토론토대 의대에서 공부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니키 아줌마, 우리 엄마한테 전해주세요. 우리 걱정 마시고 몸 건강하시라고요. 아버지는 많이 진정되셨어요. 저희는 무엇보다 엄마의 행복을 빈다고 전해주세요. 꼭 뵙고 싶다는 말씀도……?이 말을 전해들은 김 언니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이고, 아이들까지 못 볼 줄 알았는데, 애들은 내 편이었네, 그랴. 아이들이 커서 이 엄마를 다 이해해주는구먼……?

 

 

?우리 봉자 언니는 봉잡았다까, 봉? 캐서린 안그래? 그렇지, 그치??벌써 혀가 꼬부라진 니키는 마침내 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이번 회식 자리도 니키의 눈물로 끝마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소주 3병에 이어 맥주가 10병이 더 들어왔으니 마시기도 엄청나게 많이 마신 터였다.

 

 

역시 혀가 약간 꼬인 소리로 캐서린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봉잡았지, 그럼…… 미스터 권 그런 의미에서 건배, 짠.?김 언니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니들은 모른다, 정말 몰라. 암, 아무리 말혀도 알 수가 없제. 젊은 니들이 어찌 알겄냐, 30년 동안 내 맘이 월매나 썩었는가를……?김 언니의 표정은 봉을 잡은 사람답지 않게 처연해 보였다.

 

 

 

 

 

지난 수십년간 어떤 모진 풍파가 있었길래 새색시 같은 김 언니가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했는지, 미스터 권으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왕년에 여성지에서 기자 노릇을 하면서 몸에 밴 습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 언니, 아니 양봉자 여사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지하철로 늘 함께 퇴근하는 캐서린이 조목조목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캐서린은 같은 여자로서 손가락질 할 일도 없지만 김 언니가 살아온 내력을 알고 나면 그 누구도 김 언니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언니가 대충 얼버무렸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김 언니의 고향은 충북 보은쯤 되는 모양이었다. 공부에 원래 관심이 없어서 여고를 간신히 졸업하고 집에서 어영부영 지내는 김 언니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김 언니네, 곧 양씨 집안은 논농사만 80여 마지기를 짓는 인근에서 제법 유명한 부잣집이었다. 그 집안은 읍내 청년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했는데, 딸 부잣집에다 딸 다섯 모두가 한 인물을 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넷째인 봉자가 가장 출중해서 ?젊은 남자가 봉자 모르면 고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중매를 넣은 신랑감의 이름은 김광수라고 했다. 그는 보은에서 속리산을 넘으면 나오는 경북 상주의 그럴싸한 반가 출신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 있는 시사월간지에서 사진 기자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새마을운동이다 근대화다 하면서 시대 분위기가 급변한 1970년대였다고 하지만 양봉자는 부모가 정해주는 혼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직장 동료인 양봉자의 사촌 오빠를 통해 양봉자의 사진을 본 김광수는 시골 처자의 미모에, 캐서린의 표현에 따르면, 한눈에 ?뻑? 갔다.

 

 

김광수는 자동차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탁월한 기동력을 확보한 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봉자네 집을 찾아왔다.

 

 

신랑감에게 반한 이는 양봉자가 아니었다. 봉자 부친 양두만이 김광수의 물량 공세에 먼저 넘어가 버렸다.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동네 신작로를 달려 들어오는 검은색 지프가 무엇보다 양두만을 기쁘게 했다.

 

 

양두만은 저 멀리에서 먼지만 보여도 ?에헴? 하며 이웃이 듣도록 헛기침부터 하기 시작했다. 김광수가 양반 고을인 상주에서 손꼽아주는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양두만을 흐뭇하게 했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는 김광수의 것이 아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 찍으라고 회사에서 내준 차였다. 김광수는 없는 출장을 일부러 만들어, 갈비짝이며 생선을 지프에 바리바리 싣고 봉자네 마을에 진주군처럼 진군해 들어왔다.

 

 

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광수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고, 그래서 할 말도 없었다.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결혼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항변은 시무룩한 표정뿐이었다.

 

 

변죽 좋고 말주변 좋은 김광수가 느끼하기 짝이 없었으나, 김광수는 어느새 텔레비전, 손목시계, 녹음기, 스케이트, 인형 같은 선물 공세로 부모뿐 아니라 온 식구를 제 편으로 만든 터였다.

 

 

읍내에서 식을 올리고 서울에 올라와 살림을 시작했지만 김 언니는 결혼 생활에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결혼 초기 김 언니를 공주처럼 떠받들던 김 서방은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지방으로 출장 가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다.

 

 

?언니는 그래도 시집살이는 하지 않았잖아요. 젊은 나는 혼자 된 시어머니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우?? 주방에서 함께 일을 하다가 캐서린이 이렇게 말했을 때 김 언니는 한숨부터 푹 쉬며 딱 한 마디만 하더라고 했다.

 

 

?남편한테 무시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시어미한테 쥐어뜯기는 게 속이 편컸다.?잦은 출장도, 출장을 빙자한 외박도, 심지어 바람기까지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사람 대접도 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상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그럴 때마다 김 언니는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굴욕을 꿀꺽꿀꺽 삼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남편은 잔인한 사람이었다. 직장 동료들을 불러 집들이를 할 때도,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새댁이 입만 열려고 하면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무시하는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노골적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양말 벗기라고 큰소리 치는 것은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발을 씻으라고 해도 별 불만이 없었다.

 

 

대화가 안 된다고 무시하고, 뉴스 이해 못한다고 무시하고, 남편 일 이해 못한다고 성질 부리고, 책 안 읽는다고 무시하고, 심지어 반가의 예의를 모른다며 무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저 이가 일류 대학을 나왔다고 저러나?? 하고 자기의 무지를 탓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요일 오후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슬그머니 말도 없이 나가는가 하면, 평일 오후에도 느닷없이 집에 들어와 출장을 간다며 속옷을 갈아입은 뒤 바로 나가버렸다.

 

 

?여자를 만나러 나가는구나? 하고 직감했지만 또다시 무시를 당하기 싫어 뭐라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김광수로부터 이 말을 듣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무식한 게 뭘 안다고……?

 

 

양봉자를 속된 말로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 것은 김광수가 혼자 보기에 정말 아까운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끔 친정에라도 들르면 그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서울 사위였다. 김 언니가 친정 엄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럴수록 니가 잘해야 하는 겨?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무시하다 못해 언제부터인가 손찌검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제 풀에 화가 나서 씩씩거릴 때 한 마디 하기라도 하면 양봉자를 두들겨 팼다. 처음 맞을 때는 눈앞이 번쩍해서 이게 무엇인가 싶었다. 그 다음에는 코피가 쏟아지고 광대뼈가 시퍼렇게 물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만 나가면 친절한 집사님이요, 자기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가장이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어깨 위에 손을 올릴 때마다 그 무게가 김 언니에게는 천근만근이었다.

 

 

나중에 혼나지 않으려면 김 언니도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열심히 웃어야 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삿말 이외에는 남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말고 그저 웃기만 해야 했다.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가봐야 말짱 허사였다. 친정 엄마에게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럴수록 니가 잘 해야 하는 겨.? ?애들을 생각해야제.? 결혼 2년 만에 첫 애가, 그로부터 3년 후에 둘째가 태어났지만 남편은 별로 달라지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그냥 포기하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김 언니는 미스터 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시타 권, 나는 남편 벗은 몸이 너무 징그러워서 몸서리가 처지더만. 여자들이 원래 그런가? 아니, 모르지. 그래도 조심혀, 혹시 애기 엄마가 나맨치로 싫어할지도 모르니께.? 어느 날 남편은 불쑥 말을 꺼냈다.

 

 

?석달 후에 캐나다로 이민 간다.?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말도 없이 어째……?

 

 

말끝을 흐리는 김 언니에게 ?애들 교육 때문이야. 니가 애들 교육에 대해서 뭘 알아? 그러니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이들 교육은 그냥 핑계였다. 직장에서 밀려나 딱히 할 일이 없던 마당에, 캐나다에 사는 사촌형이 일을 도와 달라며 여러 해 전부터 해온 부름에 응답했을 뿐이다. 그래도 김 언니는 ?애들 교육 때문에?라는 말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큰 아이는 고등학생이었고, 둘째는 중학생이었다.

 

 

 

 

 

?김 언니가 얼마나 미련한 사람인지 알아요? 처음에는 도대체 말을 안하더라구요. 그런데 조금씩 털어놓는데,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어째 저렇게 살았나 싶더라구요. 나도 박복한 년이지만 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뭐. 그래도 우리 신랑은 때리거나 바람을 피는 건 아니니까. 나 같으면 벌써 안 살았지, 안 살았어. 어떻게 맞으면서 살아요? 지금이 어떤 시댄데?? 회식을 끝내고 옮긴 노래방에서 김 언니가 조용조용 노래 부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니키가 미스터 권에게 살짝 말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대목을 실제로 고개를 깊이 숙이고 등을 앞으로 깊이 구부린 채 고래고래 부르고 난 직후였다.

 

 

등이 휠 것 같은 정도가 아니라 하루하루 헉헉대며 겨우 버티어낸다는 느낌으로 살아온 김 언니에게 캐나다라는 나라는 신천지였다. 뾰족하게 살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땅에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남편은 한국에서처럼 위세가 등등하지 못했다. 영어도 김 언니가 두어 마디 한다면, 남편은 서너 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김 언니의 숨통을 틔워준 것은 자기가 나서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남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촌형의 집에 두어 번 찾아간 이후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바깥에 나가 팔 걷어붙이고 힘들게 돈벌이를 해야 하는 일을 두고 ?이 짓 하러 이민 왔나? 하며 불평도 할 법했다. 그러나 김 언니에게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며 앉아 있는 남편을 보지 않는 것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남편에게 더 이상 기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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